얼마 전,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들을만한 클래식 몇 곡을 추천해 준 일이 있다
본의 아니게 내 취향대로 골라주게 되었는데,
가장 먼저 생각난 곡은 브람스 호른 트리오 Op. 40 이었다.

그런데 작곡가와 작품 제목을 떠올리며 동시에 생각난 것이 있다.
그건, 이 작품과 얽힌(?) 나만의 기억.. 그리고 추억이다.

2004년 봄 이었다.
그 당시 나는 브람스가 만든 실내악곡 중 유일하게 호른이 포함된 작품이라는 이 곡을
씨디 플레이어가 불이 나도록, 씨디가 닳아 없어지진 않을까 걱정해 볼 정도로
반복해서 듣고 또 듣곤 했다.
호른과 바이올린, 피아노가 빚어내는 앙상블에 심취해
하루 종일 이 곡만 듣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었는데
햇살이 아주 좋던 어느 날,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이 곡의 악보를 빌렸고,
연대 정문에서 750번 버스를 타고 숙대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여전히 이 작품의 씨디를 플레이어에 얹힌 채로,
달리는 버스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동식 일광욕을 즐기며
악보를 얻은 기쁨에 한껏 취해있었다.

지금도 나는,
언제나 이 곡을 떠올리면 그 때 그 시간의 내가 생각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지금은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하다’ 고 미소를 머금었던 그 때의 내가말이다.

그런데 추천해 줄 곡을 하나씩 더 떠올려보다 발견한 건,
신기하게도 조금 애착을 갖고 있는 곡에는
이렇게 얽히고 얹힌(?) 기억들이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 이 작품들을 들으면
마치 타임캡슐에 그 때의 기억을 저장시켜놓기라도 한 듯이,
그 시간의 내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만방 선생님 연구실에서 선생님이 틀어주셨던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을 들을 땐
비가 오고 아주 우중충한 날이었고,

악보를 펼쳐놓고 집에서 뒹굴거리며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1번을 들을 땐
씻지도 않은 채 작품 마감을 하겠다던 내가 압박감을 뒤로 하고 농땡이를 부리며
이 곡만 반복해 들을 때였다.

푸른 하늘의 ‘마지막 그 아쉬움은 기나긴 시간 속에 묻어둔 채’ 라는 가요를 들을 땐
꼬맹이 시절 에버랜드에 놀러갔다가 청룡열차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릴 때였다.

그래서...

운전을 하다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그래요, 이렇게 헤어짐은~♪” 이런 소절이 나오면
꼬맹이 시절 에버랜드에 있던 나로 돌아가 그 때의 기분을 느끼는 것 처럼...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을 들으면 비오는 날 이만방 선생님 연구실에 있는 것 같고
멘델스존 트리오 1번을 들으면 집에서 뒹굴거리며 이 곡만 듣고 있던 그 기분이 똑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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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음악이라는 예술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작품이면서도 타임캡슐이기도 한, 요술쟁이 마법사...
그래서 내가 음악을 공부하겠다고 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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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 가지로 살짝 의기소침해진 나는
브람스 호른 트리오를 들으며 750번 버스를 타는 꿈을 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