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생활] 2002년 10월호 - 작곡가 박창수 ‘나는 온몸으로 말하는 피아노’
  • 등록일2006.01.13
  • 작성자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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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박창수 ‘나는 온몸으로 말하는 피아노’






극단적 퍼포먼스로 음악계에 충격 주었던 주인공

국내 최초 ‘하우스 콘서트’ 현장중계




이젠 집에서도 마룻바닥에 앉아 편안히 콘서트를 즐길 수 있다. ‘하우스 콘서트’. 국내 최초로 집에서 즐기는 이 콘서트장은 작곡가 겸 퍼포머, 그리고 프리뮤지션인 박창수가 주인장이다. 80,90년대 극단적인 퍼포먼스로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 그간의 실험적 행위와 ‘하우스 콘서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자유 외침’ 이 독재정권과 한동네?

집에서 열리는 음악회 ‘하우스 콘서트’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어, 이건 뭐야?’ 전화상의 설명대로라면 그의 집이 이쯤 어디일 텐데... 차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2층 테라스가 넓은 집’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경 두 사람이 길을 막고 나선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람 찾아 골목길 들어서는 데도 용건을 이야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떠오른것이 이 동네가 연희동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의 집 한 골목 건너에 전두환 전대통령의집이 있다는 것이 그때야 생각났다.



어려서부터 형식을 파괴한 연주와 기괴한 퍼포먼스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며 늘 자유로움을 외쳤던 프리뮤지션 박창수의 집이 80년대 모든 사회 구성원을 ‘국가 우선’ 이라는 틀에 꽁꽁 가두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과 지척이라니...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현관 입구에는 큰 개 래트와 작은 개 시츠가 ‘컹컹’ 소리를 내며 반긴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는 TV가 설치된, 두 평 남짓의 큰 개집. TV 프로그램 중에서도 특히 뉴스와 ‘동물의 세계’ 를 좋아 한다는 녀석들은 마침 저녁뉴스의 수해복구 현장을 보다가 손님을 ‘맞아주는’ 듯.형식적으로 몇 번 짖어댄 후 다시 TV로 눈길을 돌린다. ‘개에게 TV를 보여주다니, 또 저 큰 개집은 다 뭐야’ 과연 박창수 다웠다.



작곡가 겸 퍼포머, 프리뮤지션 등 다양한 명함이 이름 앞에 붙는 박창수. 그가 지난 7월 12일 국내에선 최초라 할 수 있는 대중적인 ‘하우스 콘서트’ 를 시작했다. ‘하우스 콘서트’ 는 말 그대로 집에서 하는 음악회. 그동안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에서나 관람할 수 있었던 음악회를 일반 주택으로 끌어들여 좀더 편하고 자유롭게 만든 것이다.



검은 색 일색의 고급스런 정장도, 한 손에 팜플렛을 들고 조금은 고상한 척 허리를 꼿꼿이 해야하는 긴장감도 필요 없는 자리. ‘하우스 콘서트’ 란 원래부터 있던 말은 아니고,제 집에서 좋아하는 이들끼리 나눈다는 뜻에서 그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모 재벌 회장이 하우스 콘서트식의 연주회를 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사교 모임에 음악을 끼워 놓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살아 있는 음악만을 느끼기 위한 콘서트를 해보고 싶었어요”







12채 한옥에 돼지 피 바르며 살풀이

서울음대 수석입학, 자유찾아 자퇴




콘서트 홀이 마련된 2층에 오르니 약 25평의 공간에 덩그러니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다. 벽 한쪽 면에 즐비한 음악 CD와 신디싸이저. 그리고 음향기구가 그가 작곡가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리하고.



“하우스 콘서트를 위해 두달 전에 집을 수리했어요. 1층은 주방과 침실, 2층은 작업실 겸콘서트 스튜디오로 꾸몄죠.바닥은 마루를 깔아 관객들이 편히 앉아서 저와 다른 연주자들이 나누는 즉흥적인 음악의 교감을 바라보거나 제가 작곡했던 곡들을 들으며 1시간 동안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첫날 콘서트엔 5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마룻바닥 가득 발 디딜 틈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첫 공연이기도 했지만 국내에선 사실상 처음으로 열린 대중적인 하우스 콘서트라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어떤 광경일까’ 하는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작곡가 박창수. 사실 ‘하우스 콘서트’ 를 열엇다는 것만으로 설명하기엔 그는 무척 벅찬(?) 사람이다. 일찌감치 10대의 나이에 동네의 온갖 액을 몰아내기 위해 알몸의 퍼포먼스를 펼쳤고, 연주와 행위를 결합시킨 24시간 12분 분량의 연주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음악계의 이단아. 피아노를 칠 줄도 모르던 여섯살에 이미 ‘콩나물 대가리’ 를 악보에 그려가며 동요 ‘노래 소리’를 작곡한 그는 피아노를 마난 여덟 살 이후 줄곧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그의 첫 퍼포먼스는 중학교 2학년때인 열네 살 무렵. 마침 한옥이 즐비한 동네에 살았던 그는 12채의 한옥 대문에 돼지 피를 묻혀 ‘12’ 라는 숫자를 쓰고 대문을 두드려 사람들을 깨웠다. 그리곤 동네 앞 공터에 불을 지핀 후 알몸차림으로 어떤 ‘의식’을 치르고는 줄행랑을 쳤던 것. ‘12’ 라는 숫자는 당시 그가 알고 있던 숫자 중 가득함을 표현했던 것이라고. ‘십이지신’ 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일종의 살풀이였던 셈이죠. 하지만 당시만 해도 어떤 실험정신이 있었다거나 의식적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지금도 예술이란 것은 배워서, 습득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자생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것이 크다고 믿거든요. 지금에 와서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제 안에 어떤 주술성, 그리고 예술적 기질이 그때부터 제자신을 깨고 나타났던 것 같아요”



그의 실험적 예술행위는 그 후에도 계속됐다. 그러나 그 역시도 철저히 계산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욕구들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온 것들. 서울예고에 다닐땐 학교의 모든 유리창을 깨는 사건을 저지르기도 했다.



“예고라 나름대로 자유로운 구석이 있긴 했지만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라강 한다는 것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였어요. 한 학기에 한 번씩 작곡 발표회가 있었는데 내 안에 채워진것이 없어도 의무적으로 발표를 해야 했어요”



하기 싫었다. 그냥 하기 싫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발표가 며칠씩 이어지면서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갔다. 준비된 곡은 없었지만, 그러나 무대에 오르면 그냥 연주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오르려고 하니 용기가 없더군요. 그래서 제 자신을 흥분시키기 위해 학교 복도의 유리창을 하나 둘 깨기 시작했죠. 다행히 모두들 작곡 발표장에 가 있느라 눈치를 채지 못했죠. 그렇게 무대에 올라 준비되지 않은 연주를 하고 내려오니 온몸에 힘이 다 빠지더군요. 다행히 선생님들의 꾸지람은 없었어요. 유리창 깬 걸 알았다면 달랐겠지만...”



그렇게 기이한 행위를 일삼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서울예고 졸업 후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수석 입학했지만 졸업하지 않고 자퇴했던 것.때는 80년대 중반, 그는 당시 미로와도 같았던 서울대 음대복도의 모든 창에 두터운 도화지를 발라 햇볕을 가린 후 자신의 퍼포먼스에 초대된 사람들을 이끌고 미로여행을시작했다. 조금의 빛이라도 새어 나올까봐 사람들의 눈은 모두 안대로 가린채. 꽹과리,드럼 등의 각종 타악기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앞사람의 손을 의지한 채 미로를 헤맸다. 그리고 그 미로와도 같던 복도를 벗어나 건물 앞으로 나오니 광장에 ‘S’자 모양의 불길이 솟아있었다.



“어둠과 혼돈의 시간을 빠져 나와 구원(SOS)의 불길을 만난다는 내용의 퍼포먼스였죠.” 하지만 당시는 군사정권이 대학 캠퍼스에도 그 세력을 펼치고 있던 시절. 놀란 경찰들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바빴고, 그 아수라장 속에서 그는 대학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극한 상황, 엽기적 연주에 관객들 비명

퍼포먼스는 분노가 폭발하는 과정




공연 시작은 저녁 8시부터. 7시 반이 지나니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 주 걸러 금요일마다 진행되는 하우스 콘서트, 지난 9월 6일에는 피아니스트 신이경의 연주가 있었고, 그 뒤로 박정민.채희철, 독일에서 활동하는 색소폰 연주자 알프레드, 작곡가 박용실 등이 12월 27일까지 차례를 기다린다. 중간중간 마임과 요가의 대가들과 박창수가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는 퍼포먼스도 인기다. 그 밖에도 유명 작곡가의 작품세계나 귀한 영상 자료를 함께 보고 토론하는 자리도 열 예정이다.



정해진 틀 없이, 제한되는 연주자 없이 진행되다 보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직업이나 나이는 다양하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과 음악에는 전혀 문외한인 사람이 함께 하고, 예순 넘은 노인과 초등학생 손자가 함께 하기도 한다. 1층 현관에서 2만원의 입장료를 내고 프로그램을 받은 후 2층 공연장으로 입장하면 그것으로 끝. 어떤 형식을 갖추거나 긴장(?)할 필요도 없이 그냥 마룻바닥에 편하게 앉거나 벽에 기대어 음악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하우스 콘서트에 대한 생각은 고등학교 때부터 가졌어요. 집이 주는 편안함과 흐트러짐. 부담없이 즐기고, 연주자와 같은 높이의 마룻바닥에 앉아 그들의 숨결까지 느끼는 것. 그리고 연주 후엔 와인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것. 하지만 젊은시절엔 제 자신 안에 있는 끓는 피를 이기지 못해 잊고 살았죠”



대학을 그만둔 후에도 그의 실험적인 연주행위는 계속됐다. 그때 당시 이미 이건용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을 순수함과 절실함의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극찬을 받은 그는 이후 국외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독일, 폴란드,영국,일본 등지에서 피아노 즉흥연주, 컴퓨터 음악, 영상등을 복합적으로 이용해 총체적 예술작업을 통해서 소리의 울림을 곳곳에 전했다.



그가 퍼포머로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지난 90년 도쿄에서 있은 공연 ‘레퀴엠’ 을 통해서다. 당시 그는 무대를 뒤덮는 하얀 천 속에 있었다. 인간의 극한 상황을 통해 자유를 강조하고 싶던 그는 경악할 만한 작업을 시도했는데, 두 손에 자갈을 쥔 채 손을 묶고, 눈을 가리고, 목구멍 깊숙이 핀 마이크를 꽂았다. 그리고 25분간의 피아노 연주. 극도의 불편함과 어둠 속에서 울려나오는 둔탁한 피아노 소리와 신음에 가까운 숨소리, 이이한 연주에 영문을 모르고 있던 관객들은 연주가 끝나고 하얀 천이 걷히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지난해 독일 공연 때는 누군가 자신의 퍼포먼스를 흉내내자 즉석에서 즉흥의 퍼포먼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제자리에서 높이 뛰어 피아노 건반에 올라간 것. 그리곤 그의 표현대로 ‘화장실 자세’ 로 연주를 했다.



“ ‘왜 그러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왜 그럴까요? 정답은 없어요. 그저 저 하고 싶은 대로, 내 안의 그 무엇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 안의 어떤 분노 같은 것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퍼포먼스가 아닐까 생각해요. 불운했던 가정사, 젊은 시절,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런 분노들, 요즘엔 전 국민의 연예인화가 제 분노의 대상이에요. 정치인, 사회사업가는 물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마저 요즘 매스컴에선 연예인 다루듯 하고 있잖아요.”









격랑을 넘어온 자의 편안함과 자유

즉흥연주는 자유 향한 또 다른 표현




1시간이 살짝 넘는 공연이 끝나자 와인파티가 시작됐다. 오늘의 연주자였던 피아니스트 신이경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박창수의 오랜 친구인 기타리스트 이병우도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어두웠던 조명을 밝힌 그가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사람들과 어울린다.



“요즘엔 이렇게 제가 준비한 마당에서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고, 한잔의 술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아요. 잊 조금 제 안의 분노를 다독거리는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요. 아니면 그 분노에게 철저하게 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그는 요 몇 년 사이 작곡이나 극단적인 퍼포먼스보다느 즉흥연주에 심취해 있다. 지금까지 에너지의 폭발을 통해 자유를 이약 했다면 요즘은 그 에너지를 제 안으로 농축시키면서 자유를 즐기고 있는 것. 한 달에 한번은 그가 직접 무대에 올라 아무런 준비 없이 즉흥연주를 한다. 관객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연주되고, 또 단 한 번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나는 것이다.



“제가 추구하는 즉흥연주, 즉 프리뮤직을 흔히들 ‘아무렇게나 하는 연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라고도 하죠. 그러나 프리뮤직은 피아노를 단지 손가락의 놀림으로 ‘치는’것이 아니라, 관객들과의 대화와 교감을 통해 온몸으로 ‘소리내는 것’ 이에요.연주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도 중요한 셈이죠. 연주자와 꼭 같을 필요는 없지만 즉흥연주를 들으면서 저마다의 머릿속에 즉흥적인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걸로 된 겁니다.”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것이 음악. 그의 홈페이지(www.free-piano.com) 에 들어가면 그가 말하는 즉흥연주의 세계가 펼쳐진다. 특히 ‘무제’(1987년)와 ‘즉흥연주’(2001년)를 들어보면 답이 나온다. 인터뷰 내내 잘 들리지도 않는 어눌한 말투로 느릿느릿 이야기를 하던 그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자유롭고 신선한 흥취가 느껴진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어려운 것은 딱 질색이에요. 그렇다고 특별히 튀거나 돋보여야 할 필요도 없구요, 그게 제가 젊은날 수많은 실험적 연주를 통해서 얻은 답이라고 할까요. 작곡이든 퍼포먼스든, 학습이 아닌 체득의 결과로 이룬 작업이어서 스스로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전 지금도 실험 중입니다."



연주가 끝나고 근 한 시간 동안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눈다. 가는 사람을 배웅하기라도 하는 듯 간간이 래트와 시츠의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준비한 와인 몇 병이 바닥을 드러내자 그가 또 다시 커다란 레드와인 한 병을 들고 나타난다. 그리곤 ‘한 잔 더 하시죠’ 하며 사람들의 빈 잔에 술을 따른다. 그가 누리는 자유를 나눠주고 있는 듯 보인다.



/취재=조득진 | 사진=정남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