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 2007년 10월호 - 어느 예술가의 아름다운 외도
  • 등록일2007.09.30
  • 작성자박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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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예술가의 아름다운 외도



박창수. 마흔셋.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2002년 7월 , 국내 처음으로 대중을 위한 ‘하우스 콘서트(http://freepiano.net)" 를 열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대형공연에 치우친 문화예술계에 위기의식을 느껴 그만의 색다른 문화공간을 만들었단다.



한 달 전쯤이다.

<사과나무> 9월호를 막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했던 어느 금요일 아침.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선민 선배가 나를 불렀다.

“미진 씨.‘하우스 콘서트’ 갈래?”

순간 나의 머리는 정지되는 듯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하우스 콘서트"에 가볼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뜻밖에 이루어진 ’하우스 콘서트‘ 와의 인연.



하우스 콘서트에는 특별한 것이 많았다. 집에서 열리는 음악회 답게 가장 먼저 ‘방석‘ 이 눈에 띄었다. 의자가 따로 없었다. 피아노를 쳤을 때 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감동을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다. 소리는 귀로만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귀뿐 아니라 온 몸으로 듣는다고 한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도 대단히 가까웠다. 따라서 연주자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렇다보니, 연주자들에게는 더없이 두려운 무대가 된다. 큰 무대라면 객석과 무대가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해 안전장치가 있는 셈인데, 이곳은 연주자들의 장단점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에, 연주자들은 마치 발가벗은 기분이란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은 만큼 관객은 연주자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으니, 감동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연주가 끝난 후 가볍게 와인을 나누며, 연주자와 관객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었다. 이런 마력 때문에 입소문만으로도 5년째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내가 간 날은 1년에 한 번 있는 영화상영 시간이었다. 유현목 감독의 <김약국의 딸들>이었는데, 산수(傘壽, 80세)가 넘은 유현목 감독님이 직접 초대돼서 관객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하우스 콘서트 덕분에 적어도 세상의 60명은 행복했을 것이다. 나 또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이렇게 따뜻한 문화공간을 만들어 준 집주인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주인장을 다시 만나러 연희동에 갔을 때, 문 앞에 걸려있던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장은 콘서트가 열리는 날에만 간판을 걸어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엄연히 일반 가정집 아닌가!

우리의 인터뷰는 주인장의 작업실이자 하우스 콘서트장인 2층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오기 전까지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었던 듯 그의 책상에는 여러장의 CD가 놓여 있었다. 아마 어제 있었던 ‘허대욱, 이필원 재즈 듀오 공연‘ 의 라이브 레코딩 작업이 덜 끝난 모양이다.

“저는 인터뷰할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에요. <사과나무>가 그동안 만났던 훌륭한 사람들에 비하면 저는...”

그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그는 자신이 인터뷰하기엔 부끄러운 사람이라 했지만,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하우스 콘서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하우스 콘서트의 주인장 박창수 씨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국내 10명밖에 안 된다는 ‘프리뮤직(free music, 즉석에서 작곡과 연주를 동시에 함)’ 을 하는 예술가이다. 14살 때 퍼포먼스를 시작했고, 우리나라에 처음 ‘행위예술‘을 알린 사람 중 한 명이다.

“예술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예고에는 한 학기에 한 번씩 발표회가 있어서친구 집에서 자주 연습을 했는데,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무대에 올라가면 그 느낌이 아닌 거에요.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내가 나이 들면 집에서 하는 음악회를 만들어 보자고요.”

그런데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하우스 콘서트는 일찍 문을 열었다. 까닭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드컵의 열기가 한국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십, 수백억 원이 들어가는 대형 공연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고, 여론은 그런 공연을 높이 평가했다. 박창수 씨는 70년대 지어진 집을 수리하려던 당시 문화예술계의 거품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2층 집의 벽을 허물고, 작업실을 오픈하기로 했다. 하우스 콘서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고행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햇수로 5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매회 적자공연이기 때문이다. 적자는 쌓이고 쌓여서 이제 4천만 원을 족히 넘는다는데, 그는 생활비로 이를 충당하고 있다.

하우스 콘서트는 회비가 있다. 현재 2만 원(고등학생 이하는 1만 원이다)을 받고 있는데, 이중에서 반은 연주자 출연료로 나가고, 남은 돈으로 음식도 장만하고, 프로그램도 만든다. 그러나 관객이 적으면 그만큼 연주자의 출연료도 적어지는 셈이다. 매번 적자를 보는 상황이라면 회비를 조금 올려서라도 오랫동안 하우스 콘서트를 유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르주아를 표방하는 공연도 아니고, 하우스 콘서트에 대한 편견도 많은 것 같고... 회비는 당분간 올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것보다 제가 하우스 콘서트를 통해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생활비를 전부 사용하고 있어서 아내에게 항상 미안해 하고 있어요.”



그런 현실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하우스 콘서트는 나날이 유명해지고 있다. 예술계에서는 나름대로 명소가 되었다. 심지어 그의 하우스 콘서트에서 공연해야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도 있다. 벌써 내년 9월까지 게스트가 예약된 상태. 그러나 아직도 자신은 큰 무대에만 서야 된다고 생각하는 예술가가 더러 있단다.

그는 하우스 콘서트가 유명해지면서 아무에게나 무대를 내주지 않고 있다. 하우스 콘서트만의 규칙을 만든 셈이다.  작은 무대라고 이곳을 리허설쯤으로 여기는 사람, 자신의 실적을 위해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 다른 사람보다 뒤쳐지기 싫어서 찾는 사람 등은 거부 한다. 대신 무엇보다 이 공간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연주자라면 실력이 조금 못 미치더라도 환영한단다.

“하우스 콘서트가 있기 전날은 열심히 청소해요. 마이크 세팅하고, 프로그램 만들고, 피아노 닦고, 리허설 하고, 음식 준비하면 하루가 금방 가요. 공연 다음 날에는 CD나 DVD 등을 만들다 보면 보통 3~4일은 필요해요. 그러다 보니 제 개인적인 작업시간이 많이 부족해요.”

음악을 즐기고 싶어 이 일을 했지만, 정작 본인은 공연 당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공간을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관객들의 말에 금새 피로를 푼다고 했다.



하우스 콘서트를 찾는 관객 중에 아들과 함께 대전에서 올라온 아버지가 있었다. 공연을 관람하고 돌아가는 길, 아버지는 오랜만에 아들과 단둘이 휴게소에서 라면을 먹었단다. 그 경험이 어찌나 좋았던지 아버지는 하우스 콘서트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하우스 콘서트가 오래도록 남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음악뿐 아니라 예쁜 추억거리도 쌓아 주길 바란다.







/ 글 . 정미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