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 등록일2006.09.04
  • 작성자권유정
  • 조회8317
4년 전 가을인가, 언론에서 천재소년이 나타났다며 하도 떠들썩하게 보도를 해서
약간은 시큰둥한 마음으로 연주회장을 찾았다.
나이에 비해 잘 치는거겠지…
그러나 연주회가 시작되고
그의 날아갈듯한 슈베르트와 화려한 라벨에 한껏 감동한 나는
우리나라에 5년 안에 더 이상 이렇게 훌륭한 10대 연주자는 안나올지도 모른다며
내기를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어느날,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전화를 해댔다.
이번엔 괴물 여자애가(-_-;)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 여고생이 교향악 축제에서
라흐마니노프 3번을 엄청나게 쳐댔다는데 장난이 아니라고들 했다.
내기가 걸려있던 차라 쉽게 믿지 않았던 나는
결국 확인하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게 되었는데…
함께 간 사람들 의견은 대부분 비슷했다
어이가 없다…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피아노를 내려치는 힘이 엄청났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저렇게 힘좋은 여자애가 있다니… 실로 놀라웠다.

그 날 밤, 내기엔 진 대가로 심하게 바가지를 쓴 나에게
사람들은 한 번 더 내기를 하자며 부추겼지만
나는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고,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기대로라면 유효기간은 아직 1년이나 남아있었고
나는 지난 금요일, 누군가를 발견했으니 말이다.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그가 모짜르트를 시작하는 순간 생각난 <환상의 여인> 첫 구절이었다.
젊은 느낌의 그러나 정확한 모짜르트에서부터
장난이 아닌데… 싶었던 스크리아빈을 거쳐
힘과 열정이 함께 느껴지던 라흐마니노프가 끝났을 때
연주에 대한 감상도 감상이지만
내가 왜 지금까지 그의 연주회를 다 놓쳤을까 싶을 만큼 아쉬움이 들었고
2부가 시작되었을 때는 도저히 벽에 등을 대고 앉기가 아까워서
(벽에 등을 댈 수 있는 몇 안되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더 다가가 연주를 듣게 되었다.
진중한 느낌의 베토벤, 그리고 리스트….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곡은 마지막 리스트였다.
지쳐서인지 너무 감정이 격해져서인지 미스터치도 좀 있었지만
듣는 내내 마음이 함께 움직여서,
음악이 끝났을 때는
순간 마음이 자리를 못 찾을 정도로 강렬하고 또 강렬했다.
지금까지 그 어느 연주회장에서도
그 어느 음반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감동을 준 그의 리스트 소나타에
정말 무한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앞서 말한 두 연주자의 장점을 합해 놓은…
다음에 만났을 때는 얼마나 깊어져 있을지 기대되는…
굳이 나이를 들먹이고 싶지 않은 연주자…
여기까지가 피아니스트 김선욱에 대한 나의 조금 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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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가 끝난 후 약속이 있어서 바로 나올 생각이었는데
막상 연주회가 끝나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공연을 보여준 연주자에게 꼭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옆에 한참을 주춤주춤 서있다가 어떤 여자분이 사진 찍을 때 잽싸게 말을 걸었는데요.
“저… 오늘 공연 너무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김선욱군에게
뭔가 격려의 말을 해줘야겠다 싶어서 급하게 말을 꺼냈는데
생각난 말이라곤 고작  “꼭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주세요” -_-;
말이 웃겼던건지 긴장해서 덜덜 떨린 목소리가 웃겼던건지(사실 많이 떨렸어요!)
주위 사람들이 좀 웃었고 너무 창피해서 그냥 인사만 하고 나와버렸습니다
음... 사실 하고싶었던 말은 "카리스마 있는 연주자가 되어주세요" 였습니다.
카리스마라는건, 최선이 아닌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에만 발휘되는 것이니까요.
그 날을 기다려봅니다.

지난 번 연주회 때의 느낌 때문에 이번 주에도 하콘을 찾았습니다.
사실은 박창수 선생님과 친절한 메일을 보내주신 정성현님에겐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기회 잡기가 쉽지 않아 이번에도 그냥 왔어요
다음엔 꼭 인사 드리겠습니다.
좋은 공연 볼 수 있는 기회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