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 속에서 "나"를 찾다...
  • 등록일2006.09.17
  • 작성자박태균
  • 조회8138
공허 속에서‘나’를   찾다 ...
- 130TH 하우스 콘서트를 다녀와서......

‘연주회’라고 하면 보통 연주자가 서있는 ‘무대’와 청중이 앉아있는 ‘관객석’이 구분되어 있는 그런 공간을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곳에 연주자가 올라와서 정적 속에서 연주하고 연주 후에는 몇 번의 박수갈채와 앵콜 공연, 그리고 물밀듯이 빠져나가는 청중들과 보이지 않는 연주자....... 이런 경우 우리는 공연 중에는 연주자와 교감하며 함께 음악을 느끼지만 연주가 끝나면 다시 연주회 전의 단절 상태를 겪게 된다.
(물론, 감동은 오래 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연주자가 아닌 나 자신의 감동이다)

그 동안 연주회장을 다니면서 항상 이런 아쉬움을 맘속에 담아왔는데, 가까운 지인을 통해 ‘하우스 콘서트’라는 생소한 공연을 알게 되었다. 연주자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눈높이를 맞추어 서로 대화-일방적인 의사 전달이 아닌-를 나눌 수 있다는 하우스 콘서트는 비록 한번도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신선했다.

겸허하고 은은한 박창수 선생님의 말씀을 시작으로, 하우스 콘서트는 내게 인사를 건네었다.

첫 작품은 ‘영상 작품’....... 사람의 얼굴에 하얀색 칠을 하고, 역시 하얀 가시를 붙여놓고 여러 색의 빛을 비추고, 여러 형상을 겹쳐 보이는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기괴하고 난해하게 느껴졌는데 문득 예전에 읽은 책이 생각나면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많은 얼굴의 긴 행렬, 강물처럼 흐르는 얼굴의 강, 수백 수천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모든 얼굴은 있는가 하면 없어지고, 또한 그곳에 함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얼굴은 끊임없이 변해서 새로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얼굴은 역시 싯다르타의 얼굴이었다....(중략)....이 모든 형체와 얼굴은 서로 천태만상으로 엉켜 각각 서로를 돕고 사랑하며, 혹은 미워하고 파괴하며, 혹은 새로 낳으며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죽어가며, 무상의 세계에서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죽는 것은 없었다. 다만 형체가 변하는 것뿐 항상 새로이 태어나며, 항상 새로운 모습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모습과 다른 새로운 모습 사이에 시간이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동시였다. 이 모든 형체와 모습은 쉬며, 흐르며, 새로 태어나며, 헤엄치며, 서로 엉켜 흐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엷은 무엇이, 형체는 없지만 그러나 실재하는 무엇이 항상 덮여 있었다. 그것은 하얀 유리 같고, 얼음 같고, 투명한 막 같고, 또는 물로 만든 가면과도 같았다. 그 가면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면이야말로 싯다르타의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후략)....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中...

그렇다. 화면 속 여인의 얼굴은 바로 싯다르타의 얼굴이며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덧, 나와 화면 속 여인은 하나가 되어 고통과 환희, 그리고 그 이외의 모든 감정들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공연은 ‘푸리’.......

얽어진다는 것과 풀어나간다는 것에 있어 그것의 해결은 지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굳이 무언가를 풀어내려 하는 것이 과연 의미는 있는 것인가?
                                                                                   - 130TH 하우스 콘서트 팜플 릿 中...

모든 존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상황에 부딪히게 되고, 우리는 그것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애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면 할수록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고 결국 우리는
‘문제의 등장’->‘해결’-> ‘새로운 문제의 등장’-> ‘해결’
이라는 순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몸에 감긴 와이어들을 풀어서 질서에 맞게 스크린에 연결할 때 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음향, 새로운 색상, 그리고 분할되는 화면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찌도 세상의 진리를 저렇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과녁을 향해 날아오는 무자비한 화살처럼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느낄 수 있는 몸짓과 화면 그리고 소리....... 마지막 와이어를 연결했을 때, 가냘픈 하나의 생명체 앞에 펼쳐진 무수히 많은 화면들이 펼쳐졌고 그 앞에서 난 한없이 작아졌다.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동안의 휴식 후 ‘소립자(소리+입자)’라는, 이름에서부터 독창성이 느껴지는 공연이 이어졌다.

이제 무의미한 소리들을 모아 하나의 예술로 콜라주해보려 한다. 흩어지는 소리들을 피아노 소리로 꿰어 소리형상을 만들고, 디지털 화로에 구워 소리 도자기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도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소리들을 허공에 흩어버리고 마음에 드는 비취 빛이 나올 때까지 소리도자기를 구울 것이다.
                                                                                      - 130TH 하우스 콘서트 팜플릿 中...

이 공연에 대한 감상은 공연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적은 일기로 대신해볼까 한다.

작은 소리 조각들이 하나씩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내가 속해 있는 이 공간 전체를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숨을 쉴 때마다 내 몸 안으로 들어와서는 그의 생명력을 마음껏 보여준다. 나는 온몸과 온정신으로 그를 느낀다. 갑자기 피아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입자들이 하나둘 제 자리를 찾아가며 질서를 이루어나간다. 부조화 속의 조화, 무질서 속의 질서, 어느 한편으로의 치우침이 없이 그들은 세상의 진리를 말하기 시작한다. 앞서 펼쳐진 두 작품으로 인해 흔들리고 공허하던 내 영혼에 다시 힘이 들어온다. 협화음이면서도 불협화음인,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리는 ‘소리 조각’들은 어느덧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아름다우면서도 추한, 추하면서도 아름다운 비취빛 도자기’를 이루어낸다. 내 입가엔 미소가 돈다.
                                                                                           - 2006. 9. 15. 태균"s 일기 中...

공연이 끝나고.......

하우스 콘서트에서는 공연이 끝나고 이를 정리하는 것 또한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나갔다. 공연물을 손으로 만지고 연주자와 가까이 몸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은은한 와인향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발코니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공간을 채우고 있던 소리입자들은 멀리 멀리, 하늘 높이 날아갔다. 어느 분이 내게 해준 말이 떠오른다.

‘지금부터 이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예술이다’


  하우스 콘서트는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끝없이 이어지는
‘예술’이 아닐까.......
                                                                                                       -    f ¡ η ё ...


p.s :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겠습니다.